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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판례 이야기

미국 소송의 디스커버리(Discovery) 절차, 우리나라에는 왜 없죠?

미국 소송과 우리나라 소송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discovery 절차의 유무일 것이다. Discovery는 본안에 대한 심리가 진행되기 전에 각자 상대방 당사자에게 필요한 증거를 제공하는 제도다. 우리나라 민사소송법에는 없는 절차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미국에서 소송을 진행하게 되는 경우 이 생소한 discovery 절차에 대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discovery 절차를 위반하였을 때 당사자에게 내려지는 미국 법원의 엄격한 제재조치가 우리나라 민사소송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는 것이다.

 

미국 법원에서의 소제기부터 discovery를 완료한 후 실제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는 일반적으로 2~3년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discovery가 제대로 대응하려면 당연히 증거 보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소송을 당했거나 또는 소송을 당할 것으로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경우 기업은 discovery 절차에서 증거로 쓰일 수 있는 모든 자료가 변경 또는 파기되지 않도록 즉시 관련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를 litigation hold라고 한다. 문제는, litigation hold 조치를 취하지 않아 소송절차 개시 이후 관련 문서가 변경되거나 파기된 정황이 드러나는 경우에는 소송상 불이익(sanction)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바로 패소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Litigation hold 의무는 회사가 소송에 대해 알게 된 순간, 또는 소송에 연관될 것이 합리적으로 예상 가능해진 순간부터 존재하게 된다. 소장이 미국 법인에 송달되기 전이라 하더라도, 모든 정황에 비추어 제소가 임박한 것으로 예상된다면 한국의 모기업도 예외 없이조치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litigation hold 의무가 발생되면 회사는 즉시 증거 보존을 위한 good faith effort(‘선의의 노력’)을 다하여야 하는데, 당사자가 선의의 노력을 다했다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 사건과 관련될 수 있는 자료를 보유하고 있거나 또는 그러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구성원들에게 (1) 미국에서 어떤 사항에 관하여 소송이 발생하였거나 또는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2) 소송과 관련된 자료의 보존이 필요하다는 점, (3) 보존이 필요한 대상 자료의 범위, (4) 관련 자료의 변경 또는 파기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즉시 공지하여야 한다.
  • 이때 위구성원들, 사건과 관련 있는 자료를 보유하고 있거나 또는 그러한 자료에 접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직원뿐만 아니라 그 보조자를 포함하며, 자료가 외부 업체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는 경우(기업용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는 경우 등)에는 그러한 외부 업체의 관리자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 또한 위자료, 종이문서뿐만 아니라 회사의 이메일 서버 및 파일 서버 내의 관련 전자문서, 임직원의 사무용 PC나 모바일 기기의 전자문서 등을 모두 포함한다.

Litigation hold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당사자에 대하여 미국 법원은 벌금을 부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당사자에게 유리한 증거를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 사실관계를 해당 당사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도 있으며, 심한 경우(고의로 증거를 인멸한다거나 또는 discovery 요구에 지속적으로 응하지 않는 경우 등)에는 바로 default 패소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출처: http://appeal.org.uk/show-us-the-evidence

한국 기업 법무팀 소속으로 미국 소송에 대응하면서 기업의 증거자료 수집부터 보호조치까지 관리해본 결과, 위에 언급한 이 litigation hold 조치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몸소 체험했었다. 증거자료 그거 우리한테 유리하게 어떻게 좀 잘해보자(?)는 식이다 보니….. 물론 이것은 discovery 절차가 생소하지 않은 미국 기업에서도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소송을 간접적이나마 경험해본 결과, 소송 전략이라는 것보다는 증거가 소송 승소 여부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것 같은데, 왜 우리나라에는 이 discovery 절차가 없는지 모르겠다. 진짜 궁금한데 누가 좀 속 시원히 설명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