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검토를 하다 보면 Representations and Warranties(진술보증) 조항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진술보증 조항의 위반 가능성에 대해서 계약 당사자간에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 알고도 계약체결을 진행했으니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큰 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 정확한 대법원의 입장을 보여주는 판례가 있다.
정유회사의 M&A 주식양수도계약서에 '양도인은 양수인에게 주식양수도계약 체결일 및 양수도 실행일에 일체의 행정 법규를 위반한 사실이 없고, 이와 관련하여 행정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거나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없다’는 내용의 진술 및 보증 조항과, '양수도 실행일 이후 보증 위반사항이 발견된 경우나 약속사항 위반으로 손해가 발생할 경우500억 원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상하기로 한다'는 손해배상 책임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계약서 체결 이후, 양도인 회사는 군용 유류 구매입찰에서 담합행위 등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과징금 납부 명령을 받고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제기된다.이에 양수인이 진술 및 보증 조항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 책임 조항을 적용하여 양도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먼저 항소심은, 양수인도 진술 및 보증 위반 사항을 알면서도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양도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수인도 이 사건 담합행위에 직접 참여했던 탓에 주식양수도 계약 체결 당시에 이미 이 사건 진술 및 보증 조항의 위반사실을 알고 있었고, 계약 협상 및 가격 산정에 반영할 수 있었음에도 방치하였다가 이후 위반사실이 존재한다는 사정을 들어 양도인 피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공평의 이념 및 신의칙상 허용될 수 없으므로, 양도인 피고는 위와 같은 악의의 주식 양수인인 원고에 대하여 이 사건 진술 및 보증 조항의 위반에 따른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이러한 공평의 이념이나 신의칙 기준으로 계약 체결을 해석하는 판례를 접한다면, 진술보증 위반의 가능성을 알고도 계약서 진행을 서두르거나 계약 체결이 꼭 필요한 경우, 당사자들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대법원의 입장은 다르다.
대법원은 원고가 그 위반사항을 계약 체결 당시 알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사건 주식양수도 계약의 양수도 실행일 이후에 이 사건 진술 및 보증 조항의 위반사항이 발견되고 그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하면, 피고들이 원고에게 그 위반사항과 상당인과관계있는 손해를 배상하기로 하는 합의를 한 것으로 해석했다. 비록 계약 체결 당시 당사자가 진술 및 보증 조항의 위반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계약서 효력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고 명확하게 판결함으로써 계약서 문언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설령 공평의 이념이나 신의칙을 적용해야 할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과 같은 일반원칙에 근거하여 계약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계약상 책임을 제한하는 것은 사적 자치의 원칙이나 법적 안정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계약서 문언을 가장 중시하고 신의칙이나 공평 이념 등을 아주 예외적으로 극히 신중하게 적용하라는 취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판례이다.
나는 대법원의 기준이 맞다고 생각된다. 공평과 신의칙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계속 달라질 것이다.
오늘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혀 가면서 사람들의 상식 수준이라는 것이 천차만별임을 어김없이 또 확인하고, 조용히 산에 가서 자연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법원 마저 공평과 신의칙이라는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한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복잡해질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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